뵘, 레퀴엠



칼 뵘의 모차르트 레퀴엠은 예전부터 이 곡의 명반을 꼽으라면 빠지지 않는 연주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처음 산 레퀴엠 음반도 뵘의 것이였죠. 알고 산 건 아니고, 처음 들은 클래식 음반이 뵘의 베토벤 5번이랑 7번 테이프였거든요. 그 때 아는 지휘자가 뵘 밖에 없어서 그냥 고른 건데, 나중에 '이 한장의 명반'을 보니까 이 음반이 있어서 웬지 뿌듯했던 기억이..

사실 이 음반은 반복해서 듣기에는 썩 좋지는 않습니다. 클렘페러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웬지 답답하고 조여진 연주 때문에 계속 듣다보면 질리기가 쉽지요. 저도 몇달 듣다가 질려서 한동안 듣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기자기하고 열정적인 번스타인의 것을 듣기 시작했죠. 들으면서, 번스타인의 것을 먼저 들었다면 뵘에는 적응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다시 바뀌었습니다. 레퀴엠이라는 곡이 결국은 '진혼 미사곡'일텐데, 번스타인 식의 격정적 연주가 물론 듣기에는 좋지만, 모차르트 시대에는 죽음이 그리 낭만적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의 회원이었습니다.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체에 대해서 많은 음모론과 가설이 돌아다니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프리메이슨은 서양 사회에 계몽주의와 합리성을 확산시키는 하나의 역할을 해왔다는 점입니다. 그런 모차르트가 죽음을, 분명히 슈베르트나 말러 같은 시선으로 보지는 않았을 테지요.

뵘의 연주가 분명 느리고 장중하고 답답한 맛은 있지만, 반대로 그런 점 때문에 '죽음'이라는 본질에 더 가까운 해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이 그렇게 떠들석하게 즐길 만한 건 아니잖아요.

사실 이 연주를 처음 들으실 분께는 음반보다는 DVD를 추천합니다. 처음 이 영상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DVD 나오기 전) P2P로 며칠 밤을 새서 받았던 기억이 나는군요. 음반과 거의 동일한 음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음반의 장중함이 영상과 맞물려 한층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는데, 듣기만 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뵘의 해석에 적합하게, 녹음 장소나 의상, 카메라워크 모두 느리고 어두운 분위기를 내도록 연출되어있습니다. 특히 카메라연출이 맘에 드는데, 굉장히 절제되면서 숭고한 느낌을 준다고 느꼈습니다. 거기에 혼신을 다하는 연주자, 시종일관 굳은 표정의 합창단과 독창자, 거기에다 모든 것을 쏟아붓는 듯한 지휘를 하는 뵘까지. 정말이지 이 영상 자체가 뵘의 화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여담이지만, 번스타인의 영상물도 있다고 해서 봤지만 그닥 감동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웬지는 모르겠습니다. 말러 영상물은 감동적이었는데...)

전에 DVD가 나왔다고 해서 살까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요번에 라이센스로도 나온다고 합니다. 무려 한글해설과 한글자막! 경험상 영상물에 한글자막이 있고없고는 감동의 크기에 굉장한 차이를 가져오기 때문에, 올해 나온 DVD중 가장 마음에 드는 물건입니다. 나오자 마자 살 계획입니다. 혹시 레퀴엠을 처음 들으시는 분이나 번스타인의 연주만 들어보셨거나...어쨌든 모두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Dies Irae(진노의 날)

by Clockoon | 2007/08/18 13:39 | 음악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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