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제의 필요성: '부러진 화살'과 '12명의 성난 사람들' 많은 이야기

1.
요즘 들어 영화 '도가니'나 '부러진 화살'로 인해 대중들 사이에서 사법부의 민주성에 대해 회의적인 여론이 일어나고 있는것 같다.

진중권이 수차례 강조했듯이, 극영화는 사실을 담아낼지는 몰라도, 그것이 진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예술, 특히 '극' 형식의 매체는 자기 자신만의 문법을 가지고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그 틀 안에서 허구든 실제든 세계를 재구축하기란 분명한 한계가 있으며, 예술가는(이 경우 영화감독은) 여러가지 극적 장치를 이용해 이 한계를 보완한다. 예를 들어 '부러진 화살'에서 김명호 교수로 연기한 배우는 안성기인데, 안성기는 한국 영화계에서 '이성적인/도덕적으로 곧은/정의의 편인' 이미지를 가진 대표적 중견 배우이다. 반면 판사로 분한 문성근은 '권위적인/감정적인/불안정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 두 배우를 캐스팅함으로서 관객은 영화가 시작하기 이전부터 극 중 스토리의 구도(안성기 - 선, 문성근 - 악)를 무의식적으로 파악하게 되며, 영화가 진행되며 존재하는 구조적 미흡함을 둘의 이미지로 메꾸어 이해한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법부'와 '민주주의'란 개념은 상충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논의를 진행한 바 있기에 세부적인 것은 생략하겠으나, 원칙적으로 사법부는 민의를 반영하지 않으며, 그리해서도 안된다. 얼핏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말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사법부의 개혁을 말할 때 흔히 쓰는 슬로건이 '권력의 시녀'란 문구다. 즉 힘있는 사람들에 편향된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이므로 그릇된 판단을 내린다면, 반대로 그들 민의를 반영해 '민중의 시녀'가 되었을 때 옳은 판단을 내린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가장 이상적인 사법체제는 어떠한 집단이나 개인의 간섭 없이 객관적인 법리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럴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사법부를 국민이 감시할 수 있는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위한 대안으로 배심원제가 꾸준히 제시되었고, 실제로 2008년부터 국민참여재판이 시행되고 있다. 물론 현행 제도는 배심원의 권한이 최소한도로 제한되어 있으므로, 이를 영미권, 더 나아가 독일 수준까지 확대하자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사실 배심원제에 대한 여론이 불거진 이유는, 최근 등장한 법정영화들이 현행 사법제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스토리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전지적 시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관객이야 자기가 배심원이라면 저딴 멍청한 판사를 치워버리고 당장 판결을 바꿔버리고 싶으리라. 그런데 다른 나라라고 안 그럴까? 예를 들어 미국 영화는 배심원제를 비판하는 내용의 법정영화가 많다. 감정적으로 판결을 내리는 배심원들, 배심원에게 로비를 하는 원고,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게 생긴 피고... 어디서 한번쯤은 봤을법한 클리셰 아닌가? 우리나라 법정영화를 보면서 '배심원제가 필요하다'란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면, 반대로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배심원제는 위험하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옳은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2.
배심원제를 다룬 미국 영화 중에서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다른 작품들이 배심원과 그 외부와의 갈등을 통해 영화를 풀어나갔다면,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배심원 '내부'에서도 극적인 갈등이 발생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꽤 오래된 영화이므로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빈민가의 소년이 양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다. 모든 증거와 증언은 소년에게 불리하다. 모든 공판이 끝나고 배심원의 판결만을 기다리고 있다. 배심원단 12명 중에 11명은 유죄를 확신한다. 그런데 단 한명만이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피고가 무죄임을 나머지 11명에게 설득하기 시작한다(배심원이 만장일치로 판결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길고 지난한 토론 끝에 11명은 소년을 무죄로 만든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대단하다. 일단 주연이 12명이다. 무슨 소리냐면, 한시간 반동안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배심원단이 판결을 내린다 -> 끝나고 집에 간다가 전부다. 그럼에도 영화 전반에서 유지되는 긴장감은 자동차가 터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여느 법정영화 못지 않게 팽팽하다. 또한 배심원 열두명의 캐릭터가 각기 다 뚜렷히 다름에 불구하고 난잡하지 않게 스토리가 흘러간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영화 미적인 부분이므로, 이 글에서 깊게 다룰 만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대단한 것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다. 사실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배심원제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자. 영화는 배심원제를 긍정하는가 부정하는가? 둘 중 아무것도 아니다. 분명히 배심원들은 잘못된 판결을 내리려 한다. 이는 검사가 제기한 증거가 (얼핏 보기에는) 확고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배심원들이 빨리 판결을 내리고 집에 가고 싶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배심원은(영화에서 이름이 등장하는 배심원은 단 둘이다) 야구 경기를 보러 가야 한다며 시종일관 징징댄다. 다른 한명은 더운 날씨를 짜증내 한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제대로 된 판결을 내릴 만한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한편 유일하게 무죄 가능성을 제기했던 배심원은 피고가 무죄라는 주장에 대해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으로 이 부분은 드래그로 숨겨놓도록 한다).
  •  노인의 증언이 시간상 맞지 않는다
  •  여자 증인이 안경을 쓰지 않았으므로 사건을 목격할 수 없다

피고에 대한 증거와 증언은 얼핏 보면 논리적으로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그 핵심적인 뼈대가 말이 되지 않으니, 피고를 유죄로 보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배심원들은 토론 과정에서 이러한 허점을 발견하고, 피고를 무죄로 만든다. 즉, 배심원은 사법부가 내린 잘못된 결정을 막아낸다. 이러한 점에서 이 영화는 배심원제에 긍정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애초에 피고가 무죄라는 보장도 없다. 단지 유죄라는 증거가 불충분할 뿐이다. 소년은 정말 양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는가? 만일 검사측이 증거를 보완해 범행사실을 증명하고 다시 기소한다면, 여기 등장한 배심원의 노력은 헛수고에 불과하게 된다. 사실 영화속 대사에서도 언급하지만, 피고가 유죄로 몰린 이유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피고 자신과 그 변호인 때문이었다("I felt that the defence wasn't conducting a thorough enough cross-examination."). 오히려 배심원제 자체는 유죄에 방해가 되면 되었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Or because it would have meant bullying and badgering a helpless old man. That doesn't sit well with a jury. Most lawyers avoid it."). 이 지점에서 영화는 배심원제라는 주제를 벗어난다. 


혹자는 이 영화를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과 민주주의의 열망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한다.


한 소년의 목숨이 달린 문제이지만 배심원들은 회의에 진지하게 참여하지는 않는다. 광고회사 직원은 농담이나 하고, 야구광은 티켓을 썩힐까봐 안달이며, 극우주의자는 자신의 정치적 윤리를 떠벌리기에 바쁘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배심원 제도가 이렇게 허술하게 운영되는지를 알면 기겁을 할 정도다. 이쯤 되면 짐작하겠지만 이 영화는 위기를 맞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은유로 제작됐다. 배심원실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의회에 가깝다. 지난 10여년간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며, 민주주의의 정신인 관용과 다원주의를 얼마나 황폐화시켰는지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 한창호


하지만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보여준다. 극중 등장하는 배심원들이 제 의견을 판단하는 기준과 과정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이는 유죄를 결정할 때나 무죄를 결정할 때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처음에 무죄를 주장한 배심원은 합리적인 사고과정에 따라 무죄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고, 검사의 주장에 따라, 혹은 다른 배심원의 의견에 따라 신경질적으로(angry) 반응해 판단할 뿐이다. 게다가 배심원실은 덥고 습하며 나중에는 비까지 내린다. 더위에 지친 배심원들은 결국 무죄를 결정하는데, 이는 요지부동인 무죄쪽을 설득하는 것보다 자기 의견을 수정하는 것이 더 빠르고 편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이성만으로는 대중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 없음을, 영화는 반증한다.

감독은 극중 장치를 통해 배심원 뿐만 아니라 관객도 압박한다. 배심원실을 비추는 카메라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점점 낮게, 그리고 배우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간다. 관객의 시야는 점점 좁고 갑갑해진다. 그 결과 무죄와 유죄라는 가치중립적 판단에, 무의식적으로 선과 악이 부여된다(물론 유죄쪽 등장인물에는 분명히 '악역'이라 할 사람이 존재하긴 하다). 그렇게 영화는 전통적인 선악 구도에 민주주의를 가미해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3.
민주주의는 그 구성원인 시민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전문가를 내세워 대의민주주의를 운용하는 것이며,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사회제도도 이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반면 배심원제는 전문가가 갖고 있던 사법권을 시민에게 분담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법부가 행정부/입법부에 비해 가치중립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주어진 증거와 기준을 통해 모두가 동일한 법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그 근간에 깔고 있다.

하지만 '도가니'나 '부러진 화살'로 인해 배심원제가 불거진 이유는 반대로 '사법부와 다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어 '도가니'의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형량을 선고해야 한다는 것이며, '부러진 화살'의 경우는 정황증거나 증언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무죄나 가벼운 형량을 선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개별사안의 경우 그렇게 판단해야 사회질서와 정의에 부합한 것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대중의 의도를 반영해 하나의 제도로 만든다고 했을 때, 과연 그 제도가 올바르게 작동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러한 대중의 의도가, 사회질서에 부합하다는 보장이 있기는 할까?


한명숙 무죄. 사법은 살아 있다. 정봉주 유죄. 사법은 죽었다. 대한민국 사법부는 제 신앙의 대상이죠. 기독교 핵심은 부활신앙. 대한민국 사법부는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기를 밥 먹 듯 하시는 분. 어찌 그 분을 안 믿을 수 있으리요.

 - 진중권

덧글

  • net진보 2012/01/24 23:37 # 답글

    직 검사이야기 들어보니 (그런이유로 아예 기소문제가...어렵다고하더군요...잡고싶은데 못잡는겨우가 실제로도 많다고하고....개인적으로 배심원재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된것이 성폭력사건과 같이 증언은 있되 물증이 없는경우...꼭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만...으음....
  • Clockoon 2012/01/25 20:25 #

    배심원제라는 것이 결국은 사법부를 보완하는 역할이긴 하지요.
  • 재규어 2012/01/24 23:47 # 답글

    OJ심슨이 다시한번 떠오르는 오늘
  • SUTHERLAND 2012/01/25 11:55 #

    서전트가 피 묻은 장갑 한변 껴봤다고 증거가 오염된 걸로 판단하는 미국 사법...
  • Clockoon 2012/01/25 20:28 #

    웬만한 영화보다 재미있는 사건이죠.
  • 민중사 2012/01/25 09:08 #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모튼 2012/01/25 09:57 # 답글

    으음. 역시 고전은 읽어 봐야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2012/01/25 18:1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Clockoon 2012/01/25 20:32 #

    두서없는 글인데 공감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여기저기 논의를 읽어봐도 막상 실제로 겪어본 사람의 의견이 그리 많지 않아서 겉도는 감이 없지 않아 있더군요.
  • kbsyoon 2017/01/23 11:16 # 삭제 답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법정 증거주의가 최선은 아니지만 그래도 증거가 부족하면 숙고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기계적으로, 심증으로, 혹은 사회 분위기에 따라서 내려버린 오판의 희장자들을 생각하면 우울해집니다. 최선은 없지만 차선은 지켜지는 사회가 되길 꿈꿔봅니다.
  • kbsyoon2 2017/01/23 11:21 # 삭제 답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법정 증거주의가 최선은 아니지만 그래도 증거가 부족하면 숙고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죠. 기계적으로, 심증으로, 혹은 사회 분위기에 따라서 내려버린 오판의 희장자들을 생각하면 우울해집니다. 최선은 없지만 차선은 지켜지는 사회가 되길 꿈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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