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신부 많은 이야기

이 과정에서 진영 논리와 편견과 선입견이 무제한 적용된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dc 갤러들의 이글루스 유입이 본격화된 시점 때부터? 네이트온과 연동하고 엠파스 블로그를 폐쇄하면서 그 사용자들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미성년자들의 가입을 허용했을 때부터?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그 사이 언저리의 어디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쓴귤





대체적인 논지에는 공감하나, 개인적으로는 현재의 이글루스 문화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저 정도의 비판과 비난과 비웃음도 없이 어떠한 형태의 자정작용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충돌이 항상 나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지만, 충돌하지 않으면 정체될 뿐입니다.

문맥의 몰락: 조이스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많은 이야기

소녀시대에 대한 이택광 교수님의 글을 읽다 보니, 문득 예전에 읽었던 짧은 글 하나가 생각나서 번역해 봅니다.
조이스에 대한 글이지만, 소녀시대에도 어느 정도 적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원글에 대해 좋은 참고가 되리라 봅니다.



문맥의 몰락: 조이스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Ludwig J. C. d’Erlette
Department of Sociology, University of Oregon


1. 자본주의적 표현 패러다임과 전(前)기호학적 맑시즘

만약 누군가 바타이의 '강력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검증한다면, 그는 즉시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전기호학적 맑시즘 혹은 놀랍게도, 계급이 객관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 만약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고수한다면, 우리는 전기호학적 맑시즘와 자본주의적 암시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역할에 대한 논의가 이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맑스는 "성적 정체성은 본능적으로 소멸한다."고 말했다. 보드리야르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통해 계급제를 공격하는 것을 권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중립적 관찰자의 중요성을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예술이 섹슈얼리티에 대해 치환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Humphrey는 자본주의적 표현 패러다임과 포스트텍스트적 내러티브 패러다임을 택일해야  한다고 말한다[1]. 하지만, '더블린 사람들'에서, 조이스는 전기호학적 맑시즘을 거부한다; '피내건의 경야'에서 그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역설한다.

손탁은 '전기호학적 맑시즘'을 내러티브 그 자체가 아닌 네오-내러티브를 묘사하는 데 사용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표현 패러다임에 대한 반상황주의적 논의도 풍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현대적 니힐리즘의 관점에서, 조이스의 작품은 포스트모던적이다. 일반적으로, 조이스의 작품은 공통적으로 예술과 성적 정체성 사이의 괴리를 그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표현 패러다임은 문맥이 커뮤니케이션에 기반한다는 명제를 암시하고 있다. 료타르는 종속변증적인 내러티브를 통해 계급에 대한 분석을 수행할 것을 제안하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 속에 있다.


2. 조이스와 자본주의적 표현 패러다임

Buxton은 자신의 논문에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예술가의 관찰자적 역할이라고 주장한다[2]. 라캉은 '전가부장제 이론'을 변증적 논리체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de Selby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 종속변증적 문화이론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고 역설한다[3].

조이스의 작품에서, 네오-변증적 섹슈얼리티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드보르는 '전기호학적 맑시즘'이 성적 정체성과 계급을 구분하는 기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율리시스'에서 드러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한다.

료타르는 "사회는 무익한 진실의 일부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Tilton에 의하면, '사회가 무익한 진실의 일부'라는 명제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회의 정적인 속성을 대변하는 한 단면이다[4]. 조이스의 작품의 주된 주제는 불합리성과, 결론적으로 계급제에 대한 결정적 오류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언어적 역설을 내포하는 포스트-구성주의적 페미니즘으로 문맥화된다.

자본주의적 표현 패러다임은 섹슈얼리티가 여전히 사회 전반에 거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는 전기호학적 맑시즘을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가의 독자(讀者)적 관점에 대한 논의 역시 활성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르트르적 실존주의에 의하면, 언어를 실체적으로 접근함으로 인해 자아를 보완할 수 있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의하면, 자본주의적 표현 패러다임과 변증적 전개념 이론은 양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라캉은 '전기호학적 맑시즘'을 통해 자아만족적 체계를 묘사하고 있다.

자아는 실체를 실체적으로 접근함으로 인해 변증적 표현 패러다임으로 문맥화될 수 있다. 때문에 Porter처럼 자본주의적 표현 패러다임이 예술과 사회의 가교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세력도 일부 존재한다[5].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의하면, 구성원의 궁극적 목적 역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조이스의 작품은 변증적이고, 자본주의적 계급의 필연적 몰락에 대해 집요하게 탐구하고 있다.




1. Humphrey, E. F. A. ed. (1997) The capitalist paradigm of expression and socialist realism.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 Buxton, D. G. (1980) Consensuses of Rubicon: Socialist realism and the capitalist paradigm of expression. Loompanics
3. de Selby, P. G. Q. ed. (1977) The capitalist paradigm of expression and socialist realism.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4. Tilton, W. O. (1981) The Iron Door: Socialist realism in the works of Cage. O’Reilly & Associates
5. Porter, B. ed. (1977) Socialist realism and the capitalist paradigm of expression. University of Oregon Press


이 글을 소개해주신 Andrew C. Bulhak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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